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토 히로부미/생애 (문단 편집) == [[오쓰 사건]] 수습 == 제1회 의회가 무사히 폐회한 후 히로부미는 별장과 술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병을 앓던 쓰다 산조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후의 니콜라이 2세)에게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히로부미는 급하게 도쿄로 출발했다. 히로부미는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러시아에 사죄를 하고, 쓰다 산조를 사형시켜 러시아에 성의를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히로부미는 전국의 학교에 니콜라이 황태자에 대한 정성이 담긴 편지를 쓸 것을 지시했다. 신사에는 황태자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라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문제는 쓰다 산조를 처형하는 것을 두고 벌어졌다. 당시 일본 국내법에 따르면 황족에 대한 살인 미수에는 사형 적용이 가능했지만 외국인 황족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다. 따라서 쓰다 산조는 일반인에 대한 살인 미수로 재판을 받아야 했고, 그에 대한 최고형은 무기징역이었다. 히로부미는 판사들에게 법리에 구애받지 말고 쓰다에게 무조건 사형을 언도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판사들은 히로부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쓰다를 사형시킬 경우 일본의 법치 능력이 의심받고, 일본 국민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로부미는 전가의 보도 중 하나인 계엄령 발동을 운운하며 판사들을 협박했다. 판사들이 히로부미의 명령에 불복하자, 마쓰카타 내각 안에서도 쓰다의 사형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다를 납치해서 권총으로 쏴죽이고 러시아에 사죄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마쓰카타 내각이 좌충우돌을 거듭하자 주일 러시아 공사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쓰다를 처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에 대해 아오키 외무대신은 "나는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아 사형 판결을 약속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쓰다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을 때 외무대신이 그 책임을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인 히로부미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등 소란이 벌어졌다. 그사이 쓰다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히로부미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는 반발하지 않았고 사건은 잘 수습되었다. 일본의 관민 모두가 러시아에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한 덕분이었다. 히로부미는 오쓰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을 전격 경질했다. 히로부미는 아오키 외무대신이 러시아 공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지 않을 경우 히로부미에게 따지라"는 식으로 실언한 것을 알고는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히로부미는 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아오키 외무대신을 독일 공사로 내쫓아버린 후 정치생명을 끊어버렸다. 히로부미의 보복성 조치로 인해 외무대신이 잘려나가면서 마쓰카타 내각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은 난항을 빚게 되었다. 마쓰카타 총리는 정권 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